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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이야기

유토피아를 위하여

by 스위트엔조이 2023. 10. 20.

이상적인 국가 유토피아

탐욕과 부조리, 불평등과 불공평한 사회의 현실에 부딪혀 좌절을 맛보게 되면 우리는 가끔 이상향의 세계를 꿈꾸곤 한다. 모두가 평등하고 공정하며 행복한 유토피아는 이룰 수 없는 꿈일까? 유토피아의 개념은 플라톤이 최초로 제시했는데 플라톤의 <국가(Politeia)>는 토머스 모어와 다른 많은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유토피아의 모델이다.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로 ‘없다’는 의미의 ‘ou’와 ‘장소’를 뜻하는 ‘topos’가 합쳐져 만들어진 합성어로, 어디에도 없는 곳을 말한다.

사회적 평등이 주어지는 곳

토마스 모어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이상적인 국가를 뜻하는 유토피아는 여러 작가의 작품에서 모델로 등장했으나 토마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 이후 ‘유토피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대개의 유토피아는 현재 상황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책을 제공한다기보다는 그것을 비꼬는 풍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토마스 모어가 그리고 있는 ‘유토피아’는 이성에 의해 정책과 제도가 실시되는 공산주의 도시국가이다. 사회적 평등이 주어지는 이곳은 노동이 가치 있는 일로 여겨지고, 모두에게 노동이 공평하게 분배되며 재산이 공유되는 사회이다.

 

유토피아를 현실로

15세기에 들어 유토피아는 좀 더 현실적인 배경을 갖게 되었다. 15세기 이후 현대까지 여러 종교집단과 정치 개혁가들이 유토피아를 모델로 한 이상적인 공동체의 건설을 꾀하였으나 대개 오래가지 못했다.

 

1663년 네덜란드 메노파 교도들이 현재의 델라웨어 주 루이스에 공산주의적 공동사회 거주지를 처음으로 건설한 것을 시작으로 약 130여 개의 공동사회가 북아메리카에 세워졌다. 게오르게 라프가 펜실베이니아와 인디애나 주에 하모니 공동체, 펜실베이니아에 이코너미 공동체를 세웠으며, 아이오와 주위 아마나 그룹은 아이오와, 셰이커교도들은 8개 주에 18개의 마을을 세웠다. 그들 중 일부는 금욕을 추구했으며 몇몇 공동사회 종파는 지금까지 활약하고 있다. 그중 가장 큰 집단은 허터파이며, 미국과 캐나다에 주로 살고 영국과 파라과이에도 정착촌을 이루고 있다.

 

이상주의적 공동체 건설은 20세기에도 계속되었으나 대개 오래가지 못했다. 종교공동체는 거의 모든 경우 신봉자들이 예언의 능력과 지혜를 가졌다고 받드는 단 1명의 강력한 인물에 의해 건설, 유지되었다. 이러한 공동체는 원래의 지도자가 살아있을 때는 번창했다가 지도자가 죽고 난 뒤에는 서서히 쇠퇴해갔다.

 

비종교적 공동체로서 처음 세워진 것은 영국의 실업가 로버트 오언이 1825년 인디에나 주의 하모니를 라프파로부터 사들여 건설한 뉴하모니였다. 공산사회라기보다 협동체 사회였는데 비록 실패했지만 종교가 아닌 사람을 위한 공동체를 만든 그를 기억하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

 

로버트 오언의 유토피아

이상도시를 구체적으로 현실화한 로버트 오언(1771~1858)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추진한 정치가이자 사업가였다. 유토피아를 꿈꾼 사람은 많으나 현실 속에서 그런 사회를 추진하고 실천에 옮긴 이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그를 기억해야 할 가치는 충분하다.

 

로버트 오언은 열 살 때부터 공장에서 일해야 할 만큼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책을 많이 읽었던 오언은 독서가 훗날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자양분이 되었다. 성실했던 오언은 스무 살 무렵 이미 공장의 지배인이 되었고 얼마 후에는 직조 공장의 공동 경영자에 오른다. 그는 공장 내에 유치원을 세워 어린이에게 최선의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공장이 위치한 지역에서는 다른 물건을 싸게 파는 소위 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했다.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다른 사업주의 반발을 사게 된 오언은 1813년 회사를 설립해 독립했다.

 

자신의 사회철학을 제시

로버트 오언은 자신의 사회철학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계획도시를 꿈꾸기 시작했고 1817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도시를 제안했다. 로버트 오언의 이상도시는 800~1000명 사이의 주민이 1인당 1에이커 정도의 경작지를 손으로 경작하도록 하고 주민들이 경작하고 남은 생산물은 노동가격으로 환산하여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는 곳이다.

 

주민들은 납세의 의무와 병역의 의무를 지는 대신 법원과 형무소는 없으며 아이들이 세 살이 될 때까지는 가정에서, 그 뒤에는 공동체에서 양육하도록 했다. 원형의 대광장을 만들고 그 주위에 주거용 건물을 세우며 대광장에는 주민 모두가 함께 식사하는 식당과 교회 학교 등을 세우는 것이 그가 꿈꾸던 이상도시였다.

 

로버트 오언의 상상이 현실로

오언은 이런 상상을 구체화해 실천에 옮겼다. 처음에 그는 소규모 공동체 사회를 조직했고 그 성공에 힘입어 전국 각지에 이와 유사한 공동체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법 종교 형태의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과 오언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자 보수적인 상류층 인사들은 지지를 철회했다.

 

그러나 오언은 좌절하지 않았다. 1825년 미국의 인디애나에 1200여 헥타르의 대지를 구입한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900명에 이르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이민길에 올랐다. 이 사회는 ‘뉴하모니’라는 명칭이 붙었는데 그곳에서 오언의 시도는 초기에 그럭저럭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그러나 정부 형태나 종교적 견해 등에 대해 여러 의견이 나오기 시작하자 오언은 더 이상 사회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노동조합의 탄생

1928년 뉴하모니 활동을 접은 오언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오언은 공동체 사회에는 더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산업혁명으로 인해 급격히 변모해 가던 영국의 노동자들은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기대했고 그는 노동조합에 참여해 전국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정부와 사업주 그리고 이들이 지원을 받는 법원은 노동조합 활동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고 노동조합 운동은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로버트 오언이 꿈꾸던 공동체 철학과 소비자조합운동은 현대에 오히려 더 재조명되고 각광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