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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이야기

왕궁 하나 받으시오

by 스위트엔조이 2024. 2. 2.

사랑의 징표를 성으로 선물한 통 큰 왕들

 

‘오다 주웠어’하고 작은 선물을 내밀어도 너무 행복하기만 한 우리는 상상도 못 할 플렉스를 한 사람이 있다. 일반인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에는 뭐가 있을까. 다이아몬드이거나 자동차, 아니면 집 한 채 정도면 평생 살아가면서 한번 받을까 말까 일 텐데 커다란 왕궁을 하나 받는다면... 그건 동화 속에나 있는 일이다. 그런 동화를 현실로 만들어 왕비에게 사랑의 징표로 성을 선물한 왕이 있다. 사랑하는 왕비에게 사랑의 징표로 왕궁을 선물한 왕에는 누가 있는지 알아 보자.

영국

고부 갈등 시달린 왕비에게 준 선물 버킹엄 궁전

 

아버지 조지 2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1760년에 즉위한 영국의 조지 3세는 즉위했을 당시 22세의 미혼이었다. 정치나 권력과 관련이 없는 여성을 왕비로 맞고 싶었던 조지 3세는 독일 귀족 집안의 17살의 어린 샬롯데를 왕비로 맞았다.

 

조지 3세와 왕비 샬롯데는 금슬이 좋아 자식을 열다섯 명이나 낳았고 왕비를 정말 사랑한 조지 3세는 아버지와 달리 후궁을 두지 않았다. 샬롯데 왕비는 조지 3세의 기대대로 절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 샬롯데의 불행은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못했다는 점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싫어한 것은 샬롯데의 못생겼다고 생각한 독특한 외모 때문이었다. 며느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 보고를 받기 위해 시종과 시녀를 직접 골라 보내고 사교모임도 좀체 허락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잔소리와 간섭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샬롯데의 스트레스는 점점 악화돼 치료를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조지 3세는 사랑하는 왕비를 위해 새로운 궁을 지었다. 사실 조지 3세도 엄격하고 딱딱한 궁의 예절을 싫어했고 비공식적이면서 자유로운 생활을 원했던 것이다. 조지 3세는 샬롯데와 결혼한 지 1년만인 1762년 새 궁으로 이사했다. 샬롯데는 새로 옮겨간 궁을 매우 좋아했다.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서 보냈고 아이들도 대부분 여기서 낳았다.

 

사람들은 새 궁을 ‘여왕의 집’이라고 불렀다. 세월이 흐르면서 궁은 확장되었고 그 궁이 바로 ‘버킹엄 궁’이다. 버킹엄 궁은 19세기에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들어가 살면서 공식적인 국왕의 거주지가 되었다.

 

스웨덴

북유럽의 베르사이유라고 불리는 드로트닝 홀름궁전

 

현재 스웨덴 왕실의 정궁으로 ‘북유럽의 베르사이유 궁전’이라고 불린다. 스웨덴어로 ‘여왕의 작은 섬’이라는 의미인 드로트닝 홀름 궁전은 1580년 스웨덴 국왕 요한 3세가 폴란드 공주였던 카타지나 야기엘론가 왕비에게 지어준 별궁이다. 카타지나는 아름다웠지만 결혼을 통한 정치적 이익을 까다롭게 쟀던 폴란드의 내부 상황으로 혼기가 늦어질 때까지 결혼하지 못했다. 1561년 폴란드의 지그문트 2세는 스웨덴 국왕 에리크 14세에게 동생인 핀란드 공작 요한과 카타지나의 결혼을 제안했다. 하지만 에리크 14세는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동생이 외국의 공주와 결혼을 하면 자신의 위치가 위험해질까 봐 답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안 요한은 에리크 14세의 동의 없이 결혼식을 올렸다. 분노한 에리크 14세는 그를 유폐했고 카타지나는 남편의 곁에 있는 것을 선택해 같이 유폐되었다. 에리크 14세가 폐위된 후 1569년 요한과 카타지나는 왕과 왕비가 되었다. 국왕이 된 요한 3세는 카타지나에게 드로트인 홀름 궁전을 지어주었다.

 

그 후 왕들이 확장을 계속해 지금의 광활한 정원을 가진 궁전이 되었다. 18세기에는 로코코 양식으로 개편되었는데 구스타르 3세는 이 궁전을 가장 아꼈던 국왕으로 주로 여름철에 머무르는 별궁으로 활용했다. 1981년 스웨덴 왕실이 번잡한 스톡홀룸 왕궁에서 벗어나 이 궁전으로 이주하면서 사실상의 법궁이 되었다. 이 궁전은 바로크식 정원, 중국식 정자 등 부대건축물과 함께 1991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스웨덴의 첫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현재는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 일가가 거주하고 있다.

 

인도

왕궁보다 아름다운 사랑하는 왕비의 무덤 타지마할

 

16세기 초에서 18세기 중반까지 인도를 다스리던 무굴제국은 이슬람 국가였다. 제국의 황제들은 이슬람교와 힌두교를 적절히 융합하여 통일 인도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타지마할은 다른 세계적인 유적과 달리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1632년에 착공되어 완공되기까지 22년이 걸린 타지마할은 아내를 위해 만든 무덤이다. 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1592~1666)은 열다섯째 아이를 낳으려다 목숨을 잃고만 사랑하는 아내 아주르만 드 바누 베감(1593~1631, 뭄타즈 마할이라고도 불리며 타지마할이란 명칭 또한 이로부터 유래했다)을 잊을 수가 없었다. 샤 자한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녀만을 위한 무덤을 짓기로 결심한다. 이란의 건축가 우스타드 이샤를 초빙한 그는 이전에 인도에 존재하던 묘를 능가하는 무덤을 세워줄 것을 요청한다. 우스타드는 그의 바람대로 세계에 둘도 없는 묘를 설계했고, 샤 자한은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 등지에서 동원된 장인들을 포함하여 총 2만여 명의 인력을 동원했으며 세계 각지에서 건축용 석재를 수입했다.

 

타지마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는 명칭이 붙을 만큼 무덤이라기 보다는 성스러운 신전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불리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었다. 먼저 세상을 뜬 부인을 기리기 위해 나라 재정이 파탄이 이를 만큼의 비용을 들여 타지마할을 지은 샤 자한은 결국 이로 인한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지 못하고 이 위기를 이용해 반기를 든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왕위를 박탈당한다. 샤 자한은 타지마할이 마주 보이는 아그라 궁에 유폐되어 죽을 때까지 부인의 묘소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