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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커피의 역사

by 스위트엔조이 2024. 1. 30.

쓰고, 시고, 향기로운. 인생을 닮은 커피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꼭 빠지지 않는 것이 커피다.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료인 커피는 천년이 넘도록 사랑을 받았고 인류가 멸망하거나 커피가 멸종되기 전까지는 그 사랑이 멈추지는 않을 듯하다. 무작위로 세계 어느 도시의 한 골목을 찍어 살펴본다고 해도 카페가 없는 곳은 없을 것이다. 한 골목에도 여러 개의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 자리하고 있고 커피 시장 또한 경쟁이 치열하다. 그럼에도 또 새로운 브랜드의 커피 전문점이 생겨나며 그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보면 정말로 커피는 세계인 모두의 음료임에 틀림없다. 검붉은 색의 시고 쓴 이 열매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소비되는 음료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얼까?

 

커피를 사랑한 사람들

 

천재 음악가 베토벤도 아침 식사에 친구라고 말하며 커피를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한잔의 커피를 만드는 나의 원두는 나에게 60여 가지의 좋은 아이디어를 가르쳐 준다.’고 말한 베토벤은 아침마다 원두를 정확히 60알을 세어 커피를 마신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랑스의 문학가 발자크는 커피가 자신을 계속 작업하도록 하는 검은 석유라고 비유했다. 하루에 몇십 잔씩 커피를 마시며 집필을 한 그는 ‘커피가 위로 미끄러져 들어가면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라며 커피를 마시면 ‘인물들은 옷을 차려입고 종이는 잉크로 뒤덮인다’고 말했다.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남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5일 동안 커피 23잔과 빵만으로 지냈다고 말했는가 하면 규칙적으로 충분한 식사를 하지 않고 커피와 술만으로 지냈다. 생활비가 넉넉지 않았을 때 고흐는 빵, 커피, 담배를 사는 것 외에 돈을 쓰지 않았다. 천재 시인 이상은 1933년 여름 서울 청진동에 ‘제비다방’을 열었고 소공동에 있던 다방 ‘낙랑파라’를 자주 찾기도 했다. 커피는 불안정한 이상에게 위안을 주는 음료였다. 낙랑파라에는 언제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와 음악과 커피가 있었다.

 

커피의 역사

 

커피나무에서 열린 생두를 일정 시간 동안 볶은 뒤 분쇄하고 물을 이용하여 그 성분을 추출한 음료인 커피는 6~7세기경 처음 발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에티오피아의 사냥꾼과 전사들은 커피 열매와 동물의 지방을 말아서 만든 원시적인 에너지바를 만들었다고도 하며 농부들은 자생하는 커피 열매를 끓여서 죽이나 약으로 먹기도 했다. 9세기 무렵 아라비아반도로 전해져 처음 재배되었으며, 나중에는 커피 열매를 끓여 그 물을 마시거나 열매의 즙을 발효시켜 카와(kawa)라는 알코올 음료를 만들어 마셨다. 그 후 기분이 좋아지고 졸음을 방지해 주는 등 수양에 도움이 되는 신비의 열매로 알려지면서 여러 이슬람 사원으로 퍼져나갔다.

이 음료는 13세기 이전까지는 성직자만 마실 수 있었으나, 그 이후부터 일반 대중들에게도 보급되었다. 이 무렵 커피는 이슬람 세력의 강력한 보호를 받았다. 커피 재배는 아라비아 지역에만 한정되었고, 다른 지역으로 커피의 종자가 나가지 못하도록 엄격히 관리되고 있었다. 커피의 수출은 오랫동안 금지되어 있었고 원두는 씨앗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모두 껍질을 벗겨서 보관했다. 이는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서이기도 지만 무엇보다 커피에 포함된 기분을 흥분시키는 성분으로 인해 커피를 일종의 마약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12~13세기에 걸쳐 십자군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슬람 지역을 침입해 온 유럽 십자군이 커피를 맛보게 되었다. 기독교 문화권인 유럽인들은 초기에는 커피를 이교도적 음료라고 배척했으나 밀무역으로 이탈리아에 유입된 뒤 교황으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음료로 공인받게 되었고, 일부 귀족들과 상인들을 중심으로 커피가 유행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14세기경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지금의 터키)은 커피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17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1세는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커피를 소개하고, 전문 커피하우스를 만들었다. 그 후 이곳을 통해 많은 사람이 커피를 기호 음료로 즐기게 되었다. 당시 터키에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하루의 커피 할당량을 준비하지 못하면 여성들이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었을 정도라고 하니, 이슬람 문화권에서의 커피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실례이다.

 

15세기에 이르러 수요가 늘자 아라비아 상인들은 이를 독점하기 위하여 수출항을 모카(Mocha)로 한정하고 다른 지역으로의 반출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그러나 16세기부터 인도에서 밀반출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17세기 말에는 네덜란드가 인도에서 커피 묘목을 들여와 유럽에 전파했다. 그 뒤 유럽의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커피를 대량 재배하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커피나무가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인도, 서인도제도, 중앙아메리카,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바로 이웃 나라인 케냐, 탄자니아 등에서도 광범위하게 재배되었다. 이렇게 커피가 점차 대중화되면서 유럽 곳곳에 커피하우스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국의 커피 역사

 

한국에서는 1896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 황제가 처음 커피를 마셨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1884년부터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알렌의 저서에는 ‘궁중에서 시종들로부터 홍차와 커피를 대접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선교사 아펜젤러의 <아펜젤러이 선교단 보고서>에는 1888년 인천에 있는 대불호텔을 통해 커피가 일반인에게 판매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1884년 미국의 천문학자 로웰은 그의 저서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커피를 대접받았다는 기록을 남겼고, 유길준의 <서유견문. 1895>에서도 커피가 중국을 통해 조선에 소개되었다고 했다. 이는 고종이 커피를 마시기 수년 전부터 대중들도 커피를 접하고 마셨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민간에서는 독일인 손탁이 정동구부락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한 이후 1913년 남대문역에 ‘남대문역 다방’이 문을 열었고, 1920년대부터 명동과 충무로, 종로 등지에 커피점들이 생겨나면서 소수 사람에게 알려졌다. 그 뒤 8.15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미군 부대에서 원두커피와 인스턴트커피들이 공급되어 대중들이 즐기는 기호 음료로 자리 잡게 되었다.